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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 천리안/하우텔/나우누리

by lolohong 2025. 7. 18.

1980~90년대, 인터넷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사람들은 전화선 하나로 전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세계의 이름은 ‘PC통신’. 지금처럼 웹브라우저를 여는 것이 아니라, 모뎀이라는 장비를 컴퓨터에 연결한 뒤 정해진 번호를 눌러 접속해야 했던 이 원시적인 네트워크는, 당시 사용자들에게는 혁명적인 연결 수단이었습니다. 오늘은 PC통신 천리안/하우텔/나우누리에 대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PC통신 천리안/하우텔/나우누리
PC통신 천리안/하우텔/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 전화선을 타고 연결된 첫 디지털 세계

 

대한민국 PC통신의 3대 거두는 바로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이들은 각각 데이콤, 한국통신, 나우콤이 운영하던 서비스로, 서로 다른 전화접속망과 운영 철학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디지털 문화를 개척한 공통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천리안은 1989년 ‘데이콤 PC-Serve’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이듬해 ‘천리안’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론칭되었습니다. 하이텔은 한국통신이 1991년 시작했고, 나우누리는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각 통신사는 자신만의 특화된 커뮤니티와 서비스를 갖고 있었고, 사용자들은 소속감을 가지고 특정 서비스에 충성했습니다. ‘천리안 유저’ ‘하이텔 유저’처럼 소속을 나눌 정도였습니다.

 

이 PC통신 서비스들은 문자 기반 인터페이스를 제공했고, 터미널 프로그램(예: 터보 텔레콤, PC-Talk 등)을 통해 화면을 조작해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VT100’이라는 텍스트 모드 기반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진이나 영상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로 오가는 글과 대화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갔습니다.

 

하이텔에는 ‘Hi-Talk’이라는 유명한 채팅 서비스가 있었고, 천리안엔 ‘천리안 만남의 광장’, 나우누리에는 ‘나우러브’ 등의 다양한 게시판과 채팅방이 운영되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실명이 아닌 닉네임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지위나 나이, 성별이 아닌, 오로지 글과 대화로만 평가받는 익명성의 세계. 그것은 지금의 온라인 문화에서 너무나 당연시되는 ‘닉네임 문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채팅은 단순한 잡담을 넘어서, 연애, 취업, 창작, 협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인기를 얻고, 특정 게시판에서는 팬덤이 형성되었으며, 동호회 중심의 자율 운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디스코드, 네이버 카페, 블로그 문화의 ‘태초의 형태’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생력을 가졌습니다.

 

‘닉네임’이라는 자아 – 현실을 벗어난 나만의 이름


PC통신의 본질은 ‘텍스트’였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알 수 없던 그곳에서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 바로 닉네임과 글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아이디’는 단순히 로그인 수단처럼 여겨지지만, 그 시절에는 닉네임 자체가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닉네임은 자아의 표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이름에 번호를 붙였고, 누군가는 시처럼 아름다운 단어를 고르고, 어떤 이는 그저 웃기고 싶어서 유머코드를 담은 닉네임을 택했습니다. 지금의 인터넷 닉네임이 짧고 기능적이라면, 당시 닉네임은 일종의 ‘문학적 수식어’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닉네임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불렀으며, 감정을 나눴습니다.

 

게시판에서 누군가의 글을 자주 읽다 보면 닉네임만 봐도 글의 분위기나 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 이 사람은 말투가 섬세해”, “이 닉네임 쓰는 사람은 매번 연애 고민 글을 써” 같은 식입니다. 닉네임은 곧 ‘디지털 정체성’이었고, 서로를 알아보는 문자의 얼굴이었습니다.

 

닉네임 문화는 곧 ‘익명성과 자율성’을 담보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조용했던 사람이 PC통신에서는 다혈질 논객이 되기도 하고, 고등학생이 대학생 행세를 하기도 했으며, 여성처럼 보였던 사람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중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진짜 나를 실험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자유였던 것입니다.

 

특히 채팅방은 닉네임 문화의 꽃이었습니다. 채팅방에서는 실시간으로 수십 명이 동시에 대화를 나눴고, 닉네임으로 상대를 기억하고, 애칭을 붙여주고, 그 자체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습니다. 어떤 닉네임은 연예인처럼 인기가 많아지고, 때로는 채팅방에서 사랑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PC통신 시절 만나 결혼한 커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화는 이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의 도토리·일촌 관계, ‘블로그’에서의 필명 문화, ‘카카오톡’의 프로필 이름과 상태메시지 등으로 이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자아 표현의 핵심 장치로서의 닉네임 문화는 인터넷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통신의 풍경, 그리고 그리운 감성들


PC통신은 기술적으로 보면 ‘인터넷 이전의 인터넷’입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너무 느리고 불편하지만, 그 속도만큼이나 깊은 관계와 서사가 만들어졌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접속’이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점입니다. 전화선을 뽑고 모뎀에 꽂은 후, ‘삐-익-삑삑삑’ 소리와 함께 천리안 서버에 연결되는 그 순간, 마치 다른 차원으로 입장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요금은 분당 과금제였기 때문에 글 하나를 읽을 때도 신중했으며,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도 여러 번 써보고 고쳐 썼습니다. 지금처럼 가볍게 쓰고 지우는 게 아닌, 한 줄 한 줄에 생각과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명장면은 ‘메일박스’였습니다. 지금의 이메일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쪽지를 보내는 것은 일종의 ‘디지털 편지’였고,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편지함을 열어 ‘1통의 새 쪽지’가 도착했다는 문구를 볼 때, 사람들은 마치 아날로그 우체통을 열 듯이 조심스럽고 진지했습니다.

 

당시 게시판 문화도 지금과는 다르게 수평적이었습니다. 관리자 없이도 질서가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한 명의 글로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는 풍경은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이었습니다. ‘지나친 장문’, ‘고운 말 사용’, ‘따뜻한 끝인사’ 같은 문화 코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은 보기 드문 ‘배려의 언어’가 오고 갔습니다.

 

PC통신은 결국 인터넷의 대중화와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1999년 다음 카페,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 이후 네이버 블로그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이어지는 ‘비주얼 기반의 인터넷 문화’가 확산되면서, 문자 중심의 PC통신은 점차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감성은 여전히 회자됐습니다. 유튜브에서 ‘PC통신 채팅방’ ASMR을 들으며 잠드는 사람들이 있고, 일부 복고 지향 커뮤니티는 ‘하이텔풍 게시판’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너무 가볍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PC통신은 가장 느리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디지털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천리안 아이디, 하이텔 닉네임, 나우누리 게시판의 분위기가 마치 어린 시절 동네 골목처럼 기억됐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공간에는 ‘말’과 ‘텍스트’가 있었습니다. 비록 기술은 사라졌지만, 그 위에 쌓인 감정과 시간의 풍경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