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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 테이프-연인들의 플레이리스트

by lolohong 2025. 7. 16.

1980~1990년대, 카세트 테이프는 단순한 음향 매체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그 속에는 단순한 노래 이상의 감정, 기억,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카세트 테이프-연인들의 플레이리스트에 대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카세트 테이프-연인들의 플레이리스트
카세트 테이프-연인들의 플레이리스트

 

손끝으로 이어지던 감성, 카세트 테이프의 시작


지금처럼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가 없던 시절, 좋아하는 곡 하나를 듣기 위해서는 라디오 앞에서 수없이 기다려야 했고, DJ가 멘트를 덜 하기를 바라며 녹음 버튼을 눌러야 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은 그렇게 시간과 정성으로 수집된 '작은 보물 상자'였습니다.

 

당시 연인들은 자주 카세트 테이프를 주고받았습니다. 생일이나 기념일,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내가 자주 듣는 노래야", "이 노래 들을 때 너 생각났어"라는 한 마디와 함께 테이프를 건네곤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USB에 담아 주는 것과 유사하지만, 그 작업의 난이도와 공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습니다. 테이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테이프 A면과 B면의 시간을 계산해 곡 순서를 맞추고, 직접 녹음하며 볼륨 조절도 신경 써야 했습니다. 때론 B면이 모자라 노래 한 곡이 중간에 잘리는 일도 허다했지만, 그조차도 추억이 되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는 사용자의 흔적을 남기는 매체이기도 했습니다. 손글씨로 작성된 트랙리스트, 마커펜으로 칠한 라벨, 테이프 커버 안쪽에 꾹꾹 눌러 쓴 메모. 이 모든 것이 ‘직접 만든 것’의 정체성이 되었고, 연인 사이에서는 일종의 ‘정성의 척도’처럼 작용했습니다. 지금은 클릭 한 번이면 누구에게나 노래를 보낼 수 있는 시대지만, 그 시절의 테이프 한 장은 시간과 애정이 담긴 ‘작은 러브레터’였습니다. 손수 녹음하고 포장했던 과정은 단순한 노래 전달이 아닌, 마음을 녹여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연필로 돌리던 기억 – 테이프가 만들어낸 풍경들


카세트 테이프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은 바로 ‘연필’입니다.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헐거워졌을 때, 사람들은 무심히 연필을 끼워 돌렸습니다. 손으로 한 바퀴 한 바퀴 조심스럽게 감아 올리는 동작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느리지만 정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연필로 테이프를 감으며 노래 한 곡을 흥얼거리던 풍경은 어느새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요즘 세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익힌 ‘생활의 기술’이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의 일상 속 존재감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인 '워크맨'이나 '아이와', '내셔널' 브랜드의 소형 플레이어는 학생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 등굣길이나 밤늦은 공부 시간, 심지어 교실 안에서도 몰래 이어폰 한쪽을 옷 속으로 숨겨 음악을 들었습니다. CD플레이어가 등장하기 전, 카세트 테이프는 오디오 콘텐츠의 표준이었습니다. 라디오 뉴스, 영어 회화, 동화책 낭독까지 모두 테이프에 담겼고, 가족이 함께 듣던 거실 오디오에는 늘 수십 장의 테이프가 꽂혀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복사’의 문화입니다. 좋아하는 테이프가 생기면, 친구에게 빈 테이프를 건네고 “이거 좀 떠줘”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더블 데크 오디오가 있는 집은 인기가 좋았고, 거기서 고스란히 옮겨 담은 복사본에도 트랙 제목을 직접 적고, 자신만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복사 테이프는 정품이 아니었지만, 사용자에게는 자신만의 버전이자 소장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오늘날 디지털 음원에는 없는, 아날로그 감성의 공유 방식이 거기엔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이프는 ‘기다림’의 미학을 품고 있었습니다. 원하는 곡을 찾기 위해 ‘감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시간, A면이 끝나면 B면으로 뒤집어야 하는 불편함, 때로는 늘어난 테이프가 플레이어 안에 걸려버리는 사고까지. 이 모든 과정은 지금의 편리한 음악 청취 방식과는 정반대지만, 그만큼 음악 하나를 듣기 위한 집중도와 몰입도는 지금보다 훨씬 컸습니다. 테이프의 시간은 느렸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깊었습니다.

 

사라졌지만 남겨진 감성 – 카세트의 재발견


2000년대 초반 CD와 MP3가 등장하며, 카세트 테이프는 빠르게 시장에서 밀려났습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음원 유통이 보편화되면서, 테이프는 ‘오래된 매체’로 분류되었고, 생산 자체도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며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기기조차 보기 힘들어졌고, 테이프는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레트로 감성'이 부상하면서 카세트 테이프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해외 유명 뮤지션들은 한정판 앨범을 카세트 테이프 형식으로 제작해 팬들에게 선보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독립 뮤지션들이 소량으로 테이프 앨범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지 음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을 담은 물건’으로서 테이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테이프를 손에 쥐고, 플레이어에 넣고, 기다리며 듣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의식’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고 장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과거의 카세트 플레이어나 워크맨을 복원하거나 수집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한정판 테이프, 특정 가수의 희귀 음반은 때로는 꽤 높은 금액에 거래되며, 소장가치를 인정받기도 합니다. 카세트 테이프는 이제 단순한 매체를 넘어,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의 감성과 기억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디지털은 편리하지만, 모든 감정을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수천 곡을 넘나들 수 있는 지금, 한 곡을 위해 귀 기울이고, 손으로 감고, 다시 들으며 ‘그 사람’을 생각하던 그 감성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진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카세트 테이프는 이제 재생되지 않아도,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습니다.


그건 사랑의 플레이리스트였고, 추억의 타임캡슐이었으며, 소리로 남은 우리의 감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