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가정용 컴퓨터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리안 백과사전 CD-ROM’입니다. 오늘은 천리안 백과사전 CD-ROM에 대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백과사전이 CD 안에? 디지털 지식의 혁명
지금처럼 인터넷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지 않던 시절, 이 CD 한 장은 마치 지식의 보고처럼 느껴졌고, 실제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문과, 이과를 가리지 않고 학생들이 숙제를 할 때나, 부모님이 특정 개념을 궁금해할 때마다, 우리는 이 광디스크를 컴퓨터에 삽입하고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당시의 백과사전은 단순히 정보 나열이 아니라, 각종 멀티미디어 요소를 갖춘 최신 디지털 콘텐츠였습니다. 사진, 일러스트, 심지어 짧은 동영상이나 음성파일까지 함께 들어 있어, 종이 사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흥미로움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천리안은 당시 PC통신의 대표 브랜드로서, 자사의 통신망과 연계된 정보 업데이트 기능까지 일부 제공했는데, 이는 오프라인 CD-ROM으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정적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백과사전이란 개념은 당대엔 굉장한 충격이었으며, 가정과 학교 모두에서 ‘미래형 지식 도구’로 각광받았습니다.
또한, 이 천리안 CD-ROM 백과사전은 ‘지식의 권위’를 디지털로 옮겨온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두산대백과 같은 전집류가 책장 한가득 꽂혀 있는 것이 가정의 ‘수준’을 상징했다면, CD-ROM 버전은 그것을 1장의 광디스크로 압축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컴퓨터에 CD 백과사전 설치는 기본’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이는 당시 컴퓨터 판매업체들의 마케팅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위키백과 이전, 우리가 믿고 읽던 정보의 세계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인터넷 백과사전이 없던 시절에 천리안 백과사전 CD-ROM은 거의 전지전능한 도구였습니다. 궁금한 내용을 타이핑하면 바로 설명이 뜨고, ‘주제별 분류’ ‘연관 항목 보기’ 기능이 있어 자연스럽게 탐색적 학습이 가능했습니다. 지금의 하이퍼링크 탐색 구조와 유사한 UI/UX를 이미 20여 년 전에 경험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철저하게 전문가 감수 기반의 자료였기에, 단순한 인터넷 게시판 정보와는 달리 ‘공신력’이 있었다는 점이 큽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보고서 과제를 낼 때, 이 CD에서 정보를 추출해 워드로 정리하고 프린트하는 방식으로 숙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타이핑 실력도 늘고, 문장 구조도 배우며, 종종 백과사전 속 이미지나 다이어그램을 그대로 출력해 붙여넣는 ‘하이테크 숙제’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즉, 단순한 지식 탐색을 넘어서 디지털 활용 교육의 도구로 기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리안 백과사전은 단순히 공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의 백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달’이라는 항목을 검색하면 천체에 대한 정의뿐 아니라 관련된 신화, 음력과의 관계, 탐사 역사까지 나오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검색하면 그림, 발명품, 생애까지 상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인터넷보다 더 유기적인 지식의 연결을 체험하게 해줬으며, 그 속에서 정보 탐색에 대한 ‘즐거움’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요즘처럼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궁금증을 설정하고, 탐색하며, 발견하는 능동적인 학습의 방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천리안 백과사전의 퇴장과 남겨진 감성
기술은 진보했지만, 우리가 CD-ROM에 대해 기억하는 감성은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천리안 백과사전은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고, 광디스크를 읽을 수 있는 CD-ROM 드라이브조차 대부분의 컴퓨터에서 사라졌지만, 그 시절 그 백과사전이 주었던 느낌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정보는 곧 귀했고, 귀한 정보를 접한다는 건 설렘과 경외감까지 동반했습니다.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든 검색 가능한 환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지한 정보 탐색의 태도였던 셈입니다.
천리안 백과사전 CD는 특정 세대에게는 ‘공부의 기억’ 그 이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밤늦게 리포트를 마감하던 순간이 떠오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무심코 검색해 본 공룡 정보가 당시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경험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보는 당시에도 많았지만, 그 접근 방식이 지금처럼 즉흥적이고 자동화된 것이 아니었기에 더 ‘내 것이 되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천리안 백과사전은 더 이상 사용되지는 않지만, 아카이브 형태로 자료를 보존하거나, 레트로 콘텐츠로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생기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 콘텐츠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복원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이 백과사전은 ‘단절된 지식의 미학’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콘텐츠로 남아 있습니다. 복잡한 검색 엔진 대신, 명확한 분류와 차분한 UI, 검증된 정보가 주는 신뢰감. 이는 요즘의 정보 피로 시대에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가치이기도 합니다.